이상진 개인전_쓸모 있는 예술 : Stitches Lighting
2021. 5. 6 - 6. 5


쓸모 있는 예술

“예술...글쎄요.
컵에 물을 담아 마실 수 있어야지, 예술작품으로서의 컵은 (저의 작업으로는) 아닌 것 같아요.
앞으로도 저는 그럴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사용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어요.”

 그저 일종에 습관처럼 작가와의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 대상 작가와 작업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할 때 나름의 예술에 대한 상상 가능한 최대한의 가능성을 크고 풍부하게 키워 안는다. 인터뷰 시 파생될 예술적 가치들을 기대하며. 이번 역시 포부를 잔뜩 안고 작가 이상진과의 인터뷰에 임했는데 작업에 대한 굵직한 방향과 시각예술과 작품에 대한 정체성 등 함께 논할 실마리들을 그는 아주 정갈하게 정리해 주었다. 디자이너답게. 대부분 작가와의 인터뷰는 작가와 함께 작업의 관념 속에서 한참 엉키고 뻗어 나갔다가 어딘지 모르는 지점에서 같이 헤매다가도 어떻게든 또 마무리되는 리좀(Rhyzome : 땅속 줄기 식물의 개념으로서 내재적이고 배척 적이지 않는 관계들의 모델 유형)과 같은 과정인데, 작가 이상진은 뻗어 나갈 수 있는 잔가지들을 모두 일찌감치 깨끗하게 정돈해 주었다. 물론 컵이라는 단어를 언급했을 때는 메레 오펜하임Méret Oppenheim의 <털로 덮인 잔, 받침 접시, 숟가락>과 이케아의 군더더기 없는 말끔한 컵이 동시에 떠올라 작가가 언급한 그 시점에서 필자 홀로 생각이 뻗어 나가 예술적 상념이 그 어디쯤 닿아 머무를 수는 있도록 여유를 남겨두긴 했다. 하여간 두 이미지를 함께 머릿속에서 중첩해 떠올리며 피식한 속웃음을 머금었는데, 생각의 줄기는 굵게 작가의 작업관의 방향대로 비교적 근사치에 접근하고는 있었다.

빛을 품은 반전의 유머, 그 중심엔 교감
 작가 이상진은 인공조명에 몰입해 빛을 이용한 작업을 시작한 2000년도쯤, 대부분의 디자이너가 선호하는 깔끔하고 모던한 인공 매체를 선택하지 않고 일상용품에 집중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제 역할을 위해 형形이 결정된 사물들에서 작가는 유별난 발상을 추상한다. 3가지 원색의 파리채는 곱게 모여 조명을 품고 스탠드로 둔갑하거나, 용이한 개폐를 위해 대량생산 된 지퍼들은 모아져 연결되어 빛을 뿜는 꽃의 형상으로 피어나기도 하고, 난로에 연통은 적당히 조화로운 균형으로 구부러져 모던한 샹들리에로, 일회용 빨대와 플라스틱 접시와 컵들은 모이고 포개어져 빛과 함께 다채로운 세련된 조명으로 메이크업 된다. 작가가 심어놓은 빛과 함께 고급스럽게 단장된 작품들을 자세히 보면, 우리 삶 속에서 흔히 사용해 왔던 저렴하고 익숙한 일상용품들이라는 것이 인식되는 순간 실소가 나온다. 작가가 언급한 대로, 마치 문고리에 당연하게 자물쇠로 꽂혀 있었던 숟가락에서 문득 원래 제 기능이 인지된 새삼스레 낯선 그 순간의 느낌이, 작가 이상진의 작업에서 추출되는 일종의 당혹스러움과 비슷할 것이다.
진화심리학에서 인간의 웃음은 두려움 혹은 복종의 감정과 연관된 공격적인 상황에서 별것 아닌 것으로 파악될 때 안도의 감정과 행위로 본다. 혹은 타인보다 내가 우월하다고 느끼는 순간이나 어떠한 상황이 상식적이지 않게 인지적·논리적 부조화가 일어나 반전이 있을 때 웃음과 미소가 나온다는 것이다. 웃음의 이러한 심리학적 기반을 토대로 작가 이상진의 작업에서의 유머(웃음) 코드는 사물의 본래 기능에 따른 상황에서 벗어나 생경한 장소에 위치해 둠(Dépaysement)으로 반전에서 오는 순간적인 심리적 긴장과 이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생뚱하게 놓인 오브제들의 그 중심에 빛을 심어 사소한 일상의 물품이 예술작품으로 그 지위를 완전하게 등극시켰다.
뭉글 몽글 기하학적으로 뭉쳐진 샹들리에나 바닥과 천장을 잇는 유기적 선형의 형태로 세운 거대한 기둥의 작업들, 외부에 우뚝 솟도록 설치한 묵직한 양감의 기념비적 형상의 조형물 모두 유심히 보면 시장에서 산 빨간 플라스틱 소쿠리들로 엮어 조형한 작품들이다. 하나의 큰 구조를 이루기 위해 포개어져 있는 형태들은 유기적이나 균등하지 않고 구조적이지만 유연하게 잇대어져 있어, 안에서부터 투과되어 나오는 빛이 공간으로 퍼지며 창출되는 환영은 환상적인 일루전을 자아낸다. 일상용품에 입혀진 작가의 시선과 감각은 그것이 진지할수록 익살스럽고 규모가 커질수록 위트있는 위엄으로 서로 상충하는 감정들이 작업에 공존해 있어 이것이 작가 이상진의 작업에 흥미를 돋우는 지점이기도 하다.
반전을 품은 작품에 위트 있는 작업을 단순히 흥미롭게만 간주하기에는 아까운 부분 역시 있다. 2008년 <Keep> 시리즈의 작업들은 빛을 감싸 안은 중첩된 철조망들을 세워 설치한 작품인데, 원래 용도는 철조망 자체가 작품이 아닌 작품을 놓기 위한 받침이었다. 두루마리의 철조망 뭉텅이는 다른 작품을 놓기 위한 작업대였는데 정작 놓인 작품보다 사람들의 관심은 작업대에 집중되었고 작가는 작업의 초점을 바로 이동시켰는데, 이 지점이 작가 이상진의 중요한 작업관으로 보인다. 일상용품에서 예술작품으로의 치환, 중심 주제인 작품과 작품을 위한 주변의 물품이 전이되는 반전을 작가는 성실히 시도 중이다. 작품에는 빛을 중심에 두고, 작업에는 관객의 반응과 사용을 그 중심으로 두는 것이다.
그의 작업 <Bookmark>와 <Bookrest>에는 따스함과 쉼이 있고, <Swing Light>와 <Cabletiepot>은 반전의 유머가 있으며,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깊이 관찰하고 통찰하려는 깊은 애정과 관심은 <Keep>을 통해 느껴진다. 그러기에 작가의 성취하고픈 예술의 최종 목적은 소통과 교감에 상당 부분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빛을 조형화한 다양하고도 친근한 모습으로 때론 달콤하게 때론 세련되게 때론 환상적인 일루전으로 다양한 옷을 입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의 작품을 사용자 마음대로 -작가가 시도한 것처럼- 특이하게 사용했으면 좋겠고, 사용하는 모습을 보며 본인의 작업의 모티브를 얻고 있다. 이것은 그의 특유한 소통의 감각이자 그의 창작 방식이며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과 삶에 집중해 그들의 반응을 묻는 그만의 특화된 창작자로서의 욕망으로 보인다. 그의 작업의 주제와 관건은 그가 관객에게 제안한 물음(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행위(반응)이다.

사용하는 예술, 고급진 소통
 창작자들의 가치 있는 정신적 산물을 보며 우리는 감각, 인지, 식견까지 확장되는 경이로움을 체험하고 깨칠 수 있지만, 그러기에 일방적일 수 있어 마주하는 관객으로 하여금 거룩한 부담감으로 압박하는 경우가 많다. 더 솔직해지자면 작품의 표피(형식, 포장)와 내용이 인문학적인 철학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창작자들의 임무 같은 과업을 –부자연스럽게 수행하는 태도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소화하고 소모하려는데 힘이 들기도 하지만, 그 와중에 진짜 예술과 예술의 무늬를 입은 것을 분간해 내려는 에너지 소모가 사실은 더 피곤한 일이다. 그럼에도 시각예술의 소위 아방가드르성은 숙명과 같은 예술의 본질이자 속성임에는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제대로 된 예술을 섭취했을 때 몸속에서의 반응과 그 효과는 엄청나고 그 힘을 신뢰하기에 그 피곤함도 신성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뿐이다.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작업들은 존재 자체로도 묵직이 우리에게 강하게 내리쬐지만 굉장히 부드러운 비물질성분으로서 우리의 마음과 몸이 그의 작품을 흡수하도록 한다. 그가 만들어낸 인공의 빛으로 작품을 쬐는 관객에게 각자가 품을 수 있는 수만 가지의 다른 자연적·경험적 감성들을 묻고 또 끌어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댄 플래빈Dan Flavin은 인공적인 빛과 환영으로 실제 공간을 재창조시키며 대량생산된 동일한 형광등을 재조합해 본인에게 중요한 영감의 개념들을 작품명으로 매치 시켜 관객에게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비추었다. 규격화된 형광등의 절제된 빛들이 만들어낸 낯선 환영 속에서 관객은 황홀한 경험을 체험함과 동시에 작가의 도발적 관념이 덧대어져 만들어낸 부조화를 겪게 되는 작업이다. 관객의 내적인 경험을 묻고, 실제와 실체에 대한 재해석의 여지를 주며, 생성과 소멸의 신성함과 초월적 환영 등은 빛을 이용한 이들의 작업이 강하게 내리쬘 수 있는 부드러운 소통의 방식이다. 인간 내면과 존재에 대한 집요한 관찰과 애정, 나와 주변과의 관계에 대한 작가 특유의 유머러스한 감각적 표현 등 그만큼 고심했을 인간적·예술적인 창작자로서의 고민은 이들의 작업 가장 중심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효용 가치가 세상에 일반적인 경제적 지표와 기준으로는 상통이 불가하기도 하고 전적으로 돈만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오묘한 그 경계에서 자칫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쓰레기가 될 수 있는 운명으로도 넘어갈 수 있는 긴장감 서린 위치에 아슬아슬하지만 신비롭게도 있는 것이 예술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예술의 가치는 비물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성분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일으키는 반응은 예측하기 힘든 강한 힘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역사적으로도 입증된-동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의 숭고한 위치를 더 견고하게 만들고 있다. 예술의 쓸모는 사용자의 사용 여부가 가장 큰 관건인 셈이다.
비물질의 조형적 숭고함을 느끼든, 익살스럽게 상식을 뒤튼 키치적 위트로 흥미로움을 느끼든, 케이블타이로 묶은 의자를 다각도로 돌려가며 자신의 몸에 맞는 가장 편안한 형태를 만들어 앉아 휴식을 찾는 몸의 기본적 욕구로서 안락함을 찾든 작가 이상진의 작품에서 창작자인 그가 우리에게 사용하라고 허용할 범위는 앞으로 더욱 관대해질 것으로 보인다. 빛을 매체로 이용하는 창작자로서 이상진의 작업에 기대하고 싶은 부분은 빛이 가진 광활하고 유연한 속성만큼이나 그의 손에서 다뤄지는 조형적 빛이 우리의 행동 뿐 아니라 마음마저 동요시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작품을 사용하는 우리의 행위에 집중하는 작가의 시선과 마음은 또 다른 반전의 계획을 꾀할 듯싶다. 작가 이상진의 예술작품의 쓸모는 결국 우리의 몸속에서 일렁이며 행위의 변화를 촉구할 테니 그와의 교감은 그러기에 계속될 것이다.